창경궁 요화당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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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화당 터 추정지 |
1. 개요 [편집]
2. 이름 [편집]
3. 역사 [편집]
1656년(효종 7년)에 효종이 공주들의 집으로 지었다. 요화당과 함께 취휘헌(翠輝軒), 난향각(蘭香閣), 계월합(桂月閤)을 만들어 각각 숙안공주 - 익평위 홍득기 부부, 숙명공주 - 청평위 심익현 부부, 숙휘공주 - 인평위 정제현 부부, 숙정공주 - 동평위 정재륜 부부에게 주었다.
원래 공주들은 혼인하면 궁 밖에 나가서 살았다. 그래서 저 건물들은 공주 부부들이 평소에 거주하는 집이 아니라 궁에 왔을 때 잠시 들르는 곳이었다.# 그마저도 효종 사후에는 공주들이 머물지 않았던 듯 하다.
공주들의 조카 숙종은 잠시 여기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. 그리고 신료들을 만나 경서를 읽고 나랏일을 보는 곳으로 활용했다.### 숙종의 아들 영조 역시 이곳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돌보고 경연을 하기도 했다.##밤에도 했었다.# 신하들이 불쌍하다
1730년(영조 6년)에 수리했다.# 1786년(정조 10년)에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빈궁으로 사용했고##,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,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, 옆에 있던 통화전을 빈전 및 빈궁으로 활용하면서 요화당을 국상 의례 장소로 썼다.#
헌종 때 지은 《궁궐지》에는 불 타 없어졌다고 나와있다.# 하지만 1907년(융희 원년) ~ 1908년(융희 2년)에 제작한 《동궐도형》에도 모습이 보이므로, 헌종 시기 이후에 재건한 듯하다.
현재는 없다. 철거 시기는 정확히 모르나 순종 시대 ~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할 때 헐린 듯 하다.
원래 공주들은 혼인하면 궁 밖에 나가서 살았다. 그래서 저 건물들은 공주 부부들이 평소에 거주하는 집이 아니라 궁에 왔을 때 잠시 들르는 곳이었다.# 그마저도 효종 사후에는 공주들이 머물지 않았던 듯 하다.
공주들의 조카 숙종은 잠시 여기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. 그리고 신료들을 만나 경서를 읽고 나랏일을 보는 곳으로 활용했다.### 숙종의 아들 영조 역시 이곳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돌보고 경연을 하기도 했다.##
1730년(영조 6년)에 수리했다.# 1786년(정조 10년)에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빈궁으로 사용했고##,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,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, 옆에 있던 통화전을 빈전 및 빈궁으로 활용하면서 요화당을 국상 의례 장소로 썼다.#
헌종 때 지은 《궁궐지》에는 불 타 없어졌다고 나와있다.# 하지만 1907년(융희 원년) ~ 1908년(융희 2년)에 제작한 《동궐도형》에도 모습이 보이므로, 헌종 시기 이후에 재건한 듯하다.
현재는 없다. 철거 시기는 정확히 모르나 순종 시대 ~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할 때 헐린 듯 하다.
4. 구조 [편집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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